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롱 황제 (문단 편집) == 평가 == 인생 역경 자체는 드라마틱하고, 기적적으로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프랑스]]와 손잡았기 때문에 현대 베트남인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우선 자롱 황제는 막당중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2~300년간 분단된 베트남을 통일한 왕조를 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꽝쭝|응우옌반후에]]도 가장 세력이 강했을 뿐 베트남을 통일하지는 못했다.] 응우옌푹아인의 사정은 어떻게 보면 명나라가 막 망했을 당시의 [[오삼계]]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오삼계는 [[이자성]] 때문에 모시던 군주가 죽고 나라가 망했고, 응우옌푹아인은 응우옌 3형제에게 가족이 몰살당하고 거지꼴로 쫓겨났다. 즉 이들은 '가족(혹은 전 주군)의 원수를 적대하기 위해 자기 민족을 배신한다'와 '민족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원수에 대한 복수심을 접어둔다'에서 전자를 고른 인물들인 것이다. 민족 개념이 강해진 현대에 와서 좋은 소리 들을 행보는 절대로 아니지만, 이들 입장에선 결코 납득이 안 가는 선택은 아니었다.[* 물론 당대에도 이를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없지는 않았다. 오삼계 역시도 결국 저거에 발목잡혀 [[삼번의 난]]이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18~19세기 베트남은 유교이념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나라였다. 본래 자신이 섬기던 나라인 응우옌씨 정권이 망해버렸고 가족까지 죽임당했으니 복수를 통해 어쩔수 없이 같은 민족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충효를 지키는 행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필 그 손을 잡은 외세가 나중에 베트남을 식민통치하게 되는 프랑스였고, 그 때문에 자신의 사정과는 별개로 현대 베트남인들의 평가가 안 좋기도 하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리엄 켈리 등 서구권 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현대의 박한 평가는 응우옌푹아인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어쨌든 정권 장악을 위한 물리적 투쟁이 끝난 이후 황제로서 응우옌푹아인은 립서비스를 하는 조언가 초청이나 가톨릭 선교의 부분적 허용 같이 전례와 크게 벗어나는 범주에서 딱히 프랑스에게 더 큰 이익이나 특혜를 준 바는 없으며, 완조 월남이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공 대상으로 전락한 건 응우옌푹아인의 탕롱 정복 이후 50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보다 더 [[나폴레옹 전쟁|중요한 일]]이 많아 그쪽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고, 실제로 베트남으로 본격적으로 손을 뻗칠 때 응우옌푹아인이 프랑스에 넘겨주었던 이권이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으므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물론 자롱 황제 자신은 서양인들을 경계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응우옌푹아인이 진짜로 군주로서 저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외세와 손을 잡은 것이라기보다도, 자신이 권좌에 오른 뒤에 펼친 통치 때문일 것이다. 숙적인 응우옌반후에가 (중앙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더라도) 사실상 기득권을 가지고 태어나서 유복한 삶을 살았음에도 농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선정을 폈던 데 비해, 응우옌푹아인은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쫓겨나서 시련을 겪으며 응우옌반후에보다 훨씬 곤궁한 삶을 겪어봤을 개연성이 높음에도, 오히려 황제가 된 다음에는 옛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장하고 군대유지를 위해 세금을 무겁게 매기며[* 사실 이 부분은 경제사학적 관점에서 실드의 여지가 있기도 하다. 오히려 조세를 안 걷는 조선이나 중국은 결국 열강의 침입에 제대로 노출되었지만, 전쟁을 많이 한 여파로 세금을 무겁게 걷었던 유럽이나 일본은 세금을 걷어 이것을 재원삼아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라를 발전시키는데 썼기 때문이다.] 옛 법전을 그대로 계승하는 등 베트남 옛 왕조들의 악습을 그대로 반복했다. 사실 권력자의 성장 환경이 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을 펼치느냐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건 아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친서민적인 정책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된 사람[*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서 [[영국]]에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해 나라를 [[복지국가]]로 탈바꿈시킨 [[클레멘트 애틀리]]가 그 예인데, 영국 역사상 최고의 수상으로서 반드시 [[윈스턴 처칠]]과 함께 1,2위를 다투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도 있는 한편 가난하게 성장해서 자수성가했음에도 권력을 잡은 뒤엔 기득권과 유착하는 인간[* [[대한민국]]의 [[이명박]]이나 [[영국]]의 [[마거릿 대처]],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가 대표적이다. 이들 셋은 각각 [[민주운동가]] 출신의 고학생, 푸줏간 집안의 자녀, 길에서 인도식 [[밀크티]]를 판매하는 행상인 출신이었으나, 임기 내내 친기득권 정책으로 일관하여 자국의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면서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도 있으며, 오히려 그의 출신이 미약했기에 구 세력의 지지를 받기 위해 이런 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높다. 출신이나 기반이 미미하기 때문에 기존 세력을 뒤엎을 정도의 힘이 없다면 오히려 기존 세력과 결탁해서 세력을 키우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현대적인 기준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기득권만 위하고 농민들을 탄압해서 농민반란을 양산해내는 왕은 전근대 기준으로 봐도 [[암군]], [[폭군]]이다. 자기 조상들처럼 고생 한번 안 해본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만큼 알 인간이 이런 짓을 했으니 그 평가가 더더욱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세와 손을 잡았더라도, 과거 자신의 숙적이었던 응우옌 3형제의 통치 방식을 참고라도 했다면 평가가 조금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